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3년 한국시리즈 (문단 편집) === [[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]]로 인한 한국시리즈 연기 === 후기리그는 원래 10월 5일 종료되었지만, [[전국체전]]이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열리면서 10월 12일에 시작하기로 결정된 상황이었다. 하지만 10월 9일 [[미얀마]]에서 일어난 [[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]]로 인해 17명의 각료가 순직하는 대참사에 따라 [[국가장|국민장]]이 거행되면서 한국시리즈 또한 미뤄지게 되었다. 처음에는 10일을 미뤄서 10월 22일에 시작하려던 한국시리즈는 3일간의 애도기간만을 가진 후 10월 15일에 시작되었다. 중간의 애도 기간동안 MBC는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, 그 이유로 "대통령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에 야구단 마크가 그려진 버스를 타고 왔다갔다 하는 게 남들의 눈에 안좋게 보이지 않겠느냐"라고 구단 차원에서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훈련을 하지 못했다. 지금 기준으로는 이해가 안될 수도 있겠지만 '''[[국제법]]상 타국 국가원수에 대한 암살이나 암살 시도는 상대국의 [[선전포고]]로 간주'''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. 즉, '''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기 때문에 프로야구고 뭐고 생각할 분위기가 아니었다.''' 그리고 이 비극적인 참사로 인한 한국시리즈 연기는 MBC 내부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. 갑자기 생긴 휴식기 동안 갈등이 수습되지 않은 것이다. 청룡이 후기리그 우승의 여세를 몰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할 수있을 것이라던 당초 예상이 빗나가는 변수가 되었다. 이 때문인지 세간에서는 "해태 우승의 숨은 공로자는 '''[[김일성]]'''"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었다. 공교롭게도 당시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한 양팀의 감독 김응용, 김동엽은 모두 이북 실향민 출신이었다.[* 특히 김동엽 감독은 38선에서 따온 등번호 38번을 고수했던 것으로 유명했다. 생전에 김동엽은 1983년 한국시리즈 패배를 회상하며 늘 아웅산 사태를 일으킨 김일성을 원망했다는 후문이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